오후 4시. 비. 젤렌카.

 

 오후 4시에 사진 한 장 올리고, 반나절 지나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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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비가 심하게 내렸고, 반드시 나가야 할 일이 없다는 걸 핑계삼아 '금일휴업'
학기 중이라도, 이런 날씨라면 아마 휴강을 했을 거다.
하루종일, 남쪽 창가 책상 앞에 앉아 유리창에 빗줄기가 부딪쳐 흐르는 걸 멍하니 보거나
젤렌카를 듣거나 독일 바로크에 대한 벤야민의 글을 읽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글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이런 문장들에 줄을 쳤다.
"불후의 아름다움은 지식의 대상이다. 불후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불려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내부에 지식으로 알아야 할 기치마저도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아름다운 것으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은 16세기 시인의 내면과 관련된 대한 묘사
"그들은 사무도 시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색창연한 문체, 제재의 적절한 배치와 정돈,
은밀한 우의적 암시, 문투에 어렴풋이 배어있는 약간의 이상야릇함, 경건함, 감탄 등이
이 예술의 몇 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시조차도 사무적인 딱딱함으로밖엔 다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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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날, 밥이 먹고 싶을 때 가는 작은 식당이 있다.
허름한 시장 골목 안에 있는, 작지만 깔끔한 그냥 밥집이다.
식당의 분위기는 주인 아줌마의 분위기,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의 분위기 속에서 반복된다.
혼자 사는 게 분명할, 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아줌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러 온다.
볶음밥도 먹고, 칼국수도 먹고, 김치찌게도 먹는다.
그 밥을 맛있게 먹으며 아줌마랑 한국말로 얘기를 한다.
너무 상냥하지도 너무 무뚝뚝하지도 않은 아줌마는 이모처럼 정답게 밥상 앞에 앉아서
그 아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주거나 티비를 본다.
그 아이들은 조금 외로운가보다. 그래서 아줌마랑 한국말을 하며 한국밥을 먹으면 조금 기운이 나나 보다.

밥을 먹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길>에 들른다.
젊은 부부가 하는 작은 커피집도 아줌마네 밥집처럼 정답다.
저 선하게 생긴 부부가 하는 작은 커피집엔 커피콩을 볶는 작은 로스팅 기계도 있고
작은 인형들과 카메라도 있고, 작고 겁이 많은 강아지도 있다.
젊은 주인이 신중하게 커피를 내리는 동안, 안주인과 짧은 대화를 하거나 가게 안을 두리번거린다.
저들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사라는 걸 해보는 중일 거다.
어색하게 커피를 내리고, 수줍게 말을 하고,  소박하게 웃는다.
저 착한 부부가 보고 싶어서, 나는 이따금 <물길>에 커피를 사러 간다. 
그들을 만나고 오는 길은 언제나 기분좋은 따뜻함으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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